군위읍
군위읍탭
군위읍
군위읍(軍威邑)은 본래 군위현(軍威縣) 현내면(縣內面) 지역으로 오항(烏項) 아천(촌)衙川(村), 성지(城旨), 노상(路上),노하(路下), 우정(右政) 백령(白嶺), 오곡(梧谷), 동토(東吐), 상토(上吐)의 10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신라시대에는 노동멱현(奴同覓縣)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전국에 9주를 설치하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군위현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군위현이
상주목에 속하였고, 인종 21년 (1143)에 다시 군위현이 일선군으로 환속되었다. 고종 32년 (1895)에는 다시 군위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군위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고종 33년(1896) 8월 4일 훈령 제 35호로 13도제가 실시 됨에 따라 경상북도 군위군에 속하였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위군(軍威郡) 남면(南面)의 중무(中武), 하무(下武) 용성(龍成), 서군(西君), 장수(長水), 지동(池洞)
구지(鳩池), 금곡(金谷)의 9개 마을과 서성면(西城面)의면곡(綿谷), 내량(內良), 외량(外良), 구명(鳩鳴), 송현(松縣), 삽령(鈒嶺), 내북(內北), 외북(外北), 중북(中北)의 9개 마을과 소본면(召本面)의 농암동(籠巖洞)일부와 의성군(義城郡) 억곡면(億谷面) 용대(龍臺), 토일(吐一)의 2개 마을을 병합하여 군위면(軍威面)으로 개편하여 무성(武成), 수서(水西), 사직(社稷), 금구(金鳩), 내량(內良), 외량(外良),
삽령(鈒嶺), 대북(大北), 동부(東部), 서부(西部), 정동(政洞), 오곡(梧谷), 하곡(下谷), 상곡(上谷), 용대동(龍臺洞)의 15개동(洞)을 관할하였다.
1915년 1월 1일 부령 제173호로 의성군 소문면(현 용대리)이 군위군 군위면에 편입되었으며(1914년 12월 22일 편입 결정),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에 의하여 의성군 금성면(義城郡 金城面) 광현 1, 2, 3동(廣峴 1, 2, 3洞)을 편입하여 16개 동을 관할 하였다. 1979년 5월 1일 군위면(軍威面)이 군위읍(軍威邑)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소보면(召保面)의
대흥 1, 2동(大興 1, 2洞)을 편입하였다. 1996년 3월 13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군위읍 서부1리가 서부 1, 3리로 분리되어 현재 34개의 행정리와 이에 속한 57개의 자연마을을 관할 하고 있다.
리
- 금구리(金鳩里)
- 내량리(內良里)
- 대흥리(大興里)
- 동부리(東部里)
- 외량리(外良里)
- 대북리(大北里)
- 서부리(西部里)
- 수서리(水西里)
- 오곡리(梧谷里)
- 용대리(龍臺里)
- 정리(政里)
- 하곡리(下谷里)
- 광현리(廣峴里)
- 무성리(武成里)
- 사직리(社稷里)
- 삽령리(鈒嶺里)
- 상곡리(上谷里)
금구리(金鳩里)
- 금구리(金鳩里)
- 금구1리(金鳩1里)에는 금곡(金谷)[쇳골, 쉿골, 싯골] 마을이 속해 있는데, 금구리(金鳩里)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뒷산에 금을 캐던 광산이 있어서 금이 나는 골이라 하여 금의 골[金谷] 즉 쇳골, 쉿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동네 뒷산이 삼곡(三谷)으로 이루어져 있어 골이 세 개 있다는 뜻으로 싯골[三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마을이 지금보다 훨씬 위쪽에 있었는데 너무 높아 지금의 마을 위치로 이주하였으며, 400여 년 전 안동권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 금구2리(金鳩2里)
- 금구2리(金鳩2里)에는 구지(鳩池)마을이 속해 있다. 금곡(金谷)[쇳골, 쉿골, 싯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비들못, 비토지(非吐地)라 부르기도 한다.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어떤 중의 말대로 못을 파고, 제사를 지내는데 못 한 가운데서 비둘기가 날며, 소나기가 쏟아져서 못에 물이 가득 차게 되어 비토지 또는 비둘기 못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1500년경 조씨(趙氏)들이 지금의 구지(鳩池) 자리에서 득세를 하고 있었는데, 관(官)에서 득세를 싫어하여 멸하고 그 자리에 못을 팔 때 비둘기가 나왔다하여 구지(鳩池)라 했다고도 한다.
내량리(內良里)
- 내량1리(內良1里)
- 내량1리(內良1里)에는 안면실(內棉谷)[안마을], 바끗(깥)면실(外棉谷)[뒨짐이, 들마을, 철점(鐵店)] 마을이 속해 있다. 안면실(內棉谷)[안마을]은 어리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량리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1400년경 탑리에서 문씨가 목화씨를 가져와서 재배하여 그 생산량이 많아 면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서 옛날에 활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으며, 미영[목화]을 많이 생산 하였다고 한다.
- 내량2리(內良2里)
- 내량2리(內良2里)에는 어리실[양곡(良谷), 어리곡(魚里谷), 언실] ,구명(鳩鳴)[안어리실, 귀명, 어리곡(魚里谷), 양곡(良谷)], 양천(良川)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어리실[양곡(良谷), 어리곡(魚里谷), 언실]은 내량2리와 외량2리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위천이 갈라졌다가 다시 어울린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옥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여 개척하였고, 구 후 1408년 홍계강(洪季康)이 정착하여 마을의 뒷산이 어질 량(良)자와 같다고 하여 어리실[良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구명(鳩鳴)[안어리실, 귀명,어리곡(魚里谷), 양곡(良谷)]은 어리실 서쪽에 있는 마을로 내량리의 중심 마을이다. 주변에 비둘기가 많아 날이 저물면 집으로 날아들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형성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양천(良川)마을은 위천의 서쪽 안어리실 동쪽에 있는 마을로 위천의 양기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흥리(大興里)
- 대흥1리(大興1里)
- 대흥1리(大興1里)에는 보동(甫洞)[보리골, 보로골, 보로동(甫老洞)], 웃진사[웃마], 아랫진사[아랫마]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보동(甫洞)[보리골, 보로골]은 대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16세기 초 통덕랑 홍유(通德郞 洪曘)가 개척하여 보로동(甫老洞)이라 하였다 하기도 하고, 고성이씨가 개척하여 보동(甫洞)이라 불렀다 하기도 한다. 웃진사는 보로골 위쪽에 있는 마을로 1807년(순조 7) 이정우(李廷佑)가 진사(進士)가 되어 이 마을에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아랫진사는 1798년(정조 22) 이광덕(李匡德)이 진사가 되어 거주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대흥2리(大興2里)
- 대흥2리(大興2里)에는 농암(籠巖)[농바우, 농바위] 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언제 누구에 의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17세기 초 옥고(玉沽)라는 선비가 처음 개척하였다고 하며, 농암(籠巖)이라는 마을명은 마을 뒷산에 장롱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그러나 마을 뒤에 연안이씨의 선조가 세웠다는 청풍정(淸風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연안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이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실제와 가까울 것으로 판단된다.
동부리(東部里)
- 동부1리(東部1里)
- 동부1리(東部1里)에는 오항(烏項)[골안(谷內), 오뭇골, 오미곡(烏尾谷), 올미골, 오미골(烏尾谷)]마을이 속해 있다. 이 마을은 아천(촌)(牙川, 衙村)[아천(雅川), 아촌(衙村)]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아촌(牙村) 남쪽 골짜기 안의 지형이 까마귀 꼬리 모양 같다고 하여 오미곡(烏尾谷)이라 불렀다. 한 때 까마귀 20여마리가 서식하여 마을 이름에 걸맞았으나, 지금은 이름만 오미곡(烏尾谷)이라 불린다.
- 동부2리(東部2里)
- 동부2리(東部2里)에는 아천(촌)(牙川, 衙村)[아천(雅川), 아촌(衙村)], 성지동(城旨洞)[쇠동골(쇳동골)]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아천(촌)(牙川(衙村)[아천(雅川), 아촌(衙村)]마을은 동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읍사무소가 위치한 중심 마을로 아천(牙川)가에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아천(雅川)으로 불리워 지던 것이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
외량리(外良里)
- 동부1리(東部1里)
- 조선 정종 때 옥씨(玉氏)가 지금의 마을 앞 남쪽 400m 지점에 마을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는데, 응계 옥고(凝溪 玉沽) 선생이 이곳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掌令)에 오르는 등 출세를 하자 옥상(玉相)터라 부르게 되었다. 선생의 호가 응계(凝溪)라 하여 마을 이름을 응천(凝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조선 중엽 참봉 홍우식(洪禹軾)이 금구동(金鳩洞)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여 근처에서 이 마을이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가장 많으며, 어진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여 어르실[양곡(良谷)]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홍씨문중(洪氏門中)이 대성(大盛)하였다고 한다. 칠탄(七灘)마을은 개봉 못 아래 있는 마을로 안어리실 건너편에 위치하며, 남양홍씨가 많이 산다.
- 외량3리(外良3里)
- 외량3리(外良3里)에는 새터(新基)마을이 속해 있다. 1924년 소보면 대흥동(현 군위읍 대흥동)에서 홍재원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일제 강점기 때 몇 집뿐이었던 것이 농암(籠岩)의 연안이씨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 마을을 이루면서 새터[新基]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 입구에 일자봉이 있는데, 대흥동(大興洞) 부근에서 남쪽으로 움직여 가는 것을 삽령동(鈒嶺洞)의 여인이 보고 산이 걷는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 멈추었다는 전설이 잇으며, 산의 모양이 일자(一字) 같이 되어 있다.
대북리(大北里)
- 대북리(大北里)는 2개의 행정리에 1600년경 인근 외량동(外良洞)에서 남계 이보(南溪 李補)가 이주하고, 중국절강성 장군 장해빈(中國 折江省 將軍 張海濱)이 임진왜란 때 와서 참전하였다가 부상당하여 이곳에 피신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본래 군위현 서성면(西城面) 지역으로 군위 읍내 북쪽 꼴짜기가 되므로 북실(북동)이라 하였다.
- 대북1리(大北1里)
- 대북1리(大北1里)에는 너운골【너문골, 월곡(越谷)】, 큰마을【큰마아,장촌(張村), 중북(中北), 중화촌(中華村), 중촌(中村)】, 소촌(蘇村)정북(正北), 위촌【이촌(李村), 외촌(外村),외북(外北)】마을이 속해 있다. 너운골【너문골, 월곡(越谷)】은 중심마을인 대북리(大北里) 중북동(中北洞)에서 보면 남쪽에 골을 넘어 마을이 위치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큰마을【큰마아, 장촌(張村), 중북(中北), 중화촌(中華村), 중촌(中村)】에 살던 절강장씨들이 고개를 넘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큰마을【큰마아,장촌(張村), 중북(中北), 중화촌(中華村), 중촌(中村)】은 절강 장씨가 이마을로 이주하면서 중화촌(中華村) 또는 중북촌(中北村)이라 부르다가 한일합병 후 대북동(大北洞)에 편입되면서 대북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절강장씨가 많이 산다고 하여 다른 동네 사람들은 장촌(張村)이라 하고, 가까운 대북리(大北里) 내에서는 큰마을이라 부른다.
- 대북2리(大北2里)
- 대북2리(大北2里)에는 내북(內北)【내북동(內北洞)】, 서원(書院)【서원동(書院洞)】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내북【내북동】은 동네 주변이 오목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골안에 동네가 있어 내북동(內北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원(書院)【서원동(書院洞)】은 남계서원(南溪書院)이 마을에 있었던데 유래된 동명이다.
서부리(西部里)
- 서부1리(西部1里)
- 서부1리(西部1里)는 노하(路下)【밤마실】마을이 속해 있는데 서부리의 가장 큰 마을로 위천가에 밤나무가 많아 밤마실이라고도 한다. 약 350년 전 송씨(宋氏)와 사공씨(司空氏)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 서부2리(西部2里)
- 서부2리(西部2里)에는 노상(路上) 마을이 속해 있는데, 노하 위쪽에 마을로 각종 관청들과 옛 관아의 터들이 밀집하고 있는 마을이다. 약350년 전 송씨(宋氏)와 사공씨(司空氏)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 서부3리(西部3里)
- 서부3리(西部3里)에는 구 군청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약350년 전 송씨(宋氏)와 사공씨(司空氏)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본래 군위현 현내면(縣內面) 노하동(路下洞)에 속하였다.
수서리(수서리)
- 수서리는 2개의 행정리에 서군동(西君洞), 장수동(長水洞)【안장수골, 장수골(長水谷)】, 외장수동(外長水洞)【바끗(깥)장수동】, 배다리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무순(崔武順)이 이곳으로 피난을 오면서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한다.
- 수서1리(水西1里)
- 수서1리(水西1里) 서군동(西君洞)【서구이】이 속해 있다. 수서리(水西里)에 으뜸가는 마을로 옛날 동네 앞 강변 서쪽에 큰 호수가 있어 서호동(西湖洞)이라 불렀으며, 동네 중앙에 서호재사가 있었다. 동네 입구 강에 서군교(西君橋)가 있고, 산골에 (西君池)가 있다.
- 수서2리(水西2里)
- 수서2리(水西2里)에는 장수동(長水洞)【안장수골, 장수골(長水谷)】, 외장수동(外長水洞)【바끗(깥)장수동】, 배다리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장수동(長水洞)【안장수골, 장수골(長水谷)】은 서군동(西君洞)【서구이】남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동네가 계곡에서 약 2km 정도 들어간 곳에 있어 안장수골이라 부르며, 안장수골에서 안쪽으로 약 2km의 계곡이 뻗어 있어 수원이 풍부하다하여 장수골(長水)골이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성김씨, 경주최씨, 분성배씨 3성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개척되었다 하거나, 1620년 (광해군 12)에 최씨가 개척하였다고 도 한다. 외장수동(外長水洞)【바끗(깥)장수동】은 위천변에 위치하여 배로 건너다녔다 하여 배다리(船橋)라고도 한다. 약 80여년전 안마을에 살던 분성배싸(盆城裵氏)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 장수동 바깥쪽에 새롭게 생간 마을이라 하여 외장수동(外長水洞)이라 부르기도 한다.
오곡리(오곡리)
- 오곡리는 1개의 행정리에 오실(梧實)【안마을, 오곡(梧谷)】, 거릇마【그릇마】, 양지말【양지편(陽地便)】, 음지말【음지편(陰地便)】, 느치미【미치이】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오실(梧實)【안마을, 오곡(梧谷)】은 오동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며, 거릇마【그릇마】는 오실(梧實) 마을 서쪽 국도변에 위치한 마을로 본동(本洞)까지 들어가지 않고 한길 곁에 있으므로 거릇마라 부른다.
용대리(용대리)
- 용대리는 용대(龍台) 수암(水岩)【무지바우】, 새터【新基】, 장자곡(長子谷)【장자골, 장자울, 장자곡】, 양지(陽地)【양지마아】, 店村【점마아, 점마을】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는데, 용대(龍台)는 고려말 김해김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뒷산의 형세가 용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용대(龍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수암(水岩)【무지바우】은 300년 전 청주 한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장자골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기암괴석이 많고 수질이 좋으며, 4시(四時)로 물이 나오는 바위가 있어서 수암(水岩)이라하였다. 새터【新基】는 장자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그 시기는 알수 없으나, 점마아에서 주민이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장자골(長子谷)【장자골, 장자울, 장자곡】은 용대(龍台) 서쪽에 위치하며, 부자가 많이 살았던 마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양지(陽地)【양지마아】는 양지 바른 마을이므로 양지마을이라 부른다. 점촌(占村)【점마아, 점마을】은 장자골 북쪽에 위치하며, 옹기를 굽는 점골이 있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며, 점마아 중앙에 옹기점 터인 점터가 있다.
정리(政里)
- 정리(政里)는 3개의 행정리에 우정동(右政洞)【우정골(右政谷)】, 좌정골【좌정곡(左政谷)】, 백령동(白嶺洞)【흰재】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있다.
- 정1리(政1里)
- 정1리(政1里)는 우정동(右政洞)【우정골(右政谷)】이 속해 있다 선방산(船放山)을 향하여 우축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나씨(羅氏)가 우정승(右政丞)을 역임하고,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정골(右政谷)】이라 불렀다 한다.
- 정2리(政2里)
- 정2리(政2里)에는 좌정골【좌정곡(左政谷)】이 속해 있다. 선방산(船放山)을 향해 좌측에 위치하며, 나씨(羅氏)가 우정승(右政丞)을 역임하고,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정골(右政谷)】이라 불렀다 한다.
- 정3리(政3里)
- 정3리(政3里)에는 백령동(白嶺洞)【흰재】이 속해 있으며, 좌정골【좌정곡(左政谷)】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통덕랑 이광철(通德郞 李光哲)이 1529년 정착하여 흰 바위가 많기 때문에 흰재(白嶺)라 부르게 되었다. 또 일설에는 한 노인이 지금의 백령리(白嶺里) 흰재를 지나다가 길지(吉地)임을 알아보고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흰 바위틈에서 백마(白馬) 한필이 긴 울음을 내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후 이 마을을 백마(白馬)라 불리어졌으나, 흰말을 싫어하는 풍습이 있어 백령(白嶺) 흰재로 고쳐 불렀다고도 한다.
하곡리(下谷里)
- 하곡리(下谷里)는 가리미【부처가리미, 가음(佳音), 갈음리(喝飮里)】, 동토일(東吐日)【동리(東里), 동토(東吐)】, 동곡(東谷)【동골, 솥골, 속곡(束谷)】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 상곡동(上谷洞)의 토일(吐日)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토일 또는 하토곡(下吐谷)이라 하였다.
- 가리미【부처가리미, 가음(佳音), 갈음리(喝飮里)】는 갈림길 즉 의성 탑리, 상곡, 용대의 삼거리에 있는 분기점이다. 동네 중앙에 약 200년 전에 만들었다는 부처【미륵】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리미라고도 하며 또 앞산이 갈마음수형(갈마음수형)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이 마을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형성되었는지 는 알수 없다 동토일(東吐日)【동리(東里), 동토(東吐)】은 하곡동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며 , 토일(吐日)의 입구가 되는 마을로서 옛 성터인 마정산 아래에 자리 잡아 있다가 불탄 후에는 동쪽으로 옮겨졌다. 군위읍에서 볼때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하여 동리(東里) 불렀다.
광현리(廣峴里)
- 광현1리(廣峴1里)
- 억곡(億谷)[윗마, 무쇠골, 무이쇠골, 억실, 대리동(大里洞), 상리(上里), 사창(社倉)] 마을이 속해 있다. 조선시대에 억곡면(億谷面) 소재지로서 큰 마을이라 불려졌기 때문에 대리동(大里洞)이라기도 하였다. 억곡(億谷)은 속칭 억실 또는 사창(社倉)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곳에 사창이 있어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윤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도 하며, 계곡이 많이 있다하여 억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 광현2리(廣峴2里)
- 장대곡(長大谷)[장때골, 장대골, 하리(下里)] 마을이 속해 있다. 대리동(大里洞) 아랫마을이라 하여 하리(下里)로 불렀다. 장대골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약 200여 년 전에 장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여승의 성품이 장대처럼 곧아 그 분의 성품을 본 따서 된 마을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장자터라는 골에 장씨(蔣氏)가 번창하게 살았는데, 그 골짜기가 깊고 길어서 장대곡(長大谷)이라 불렀다 한다.
- 광현3리(廣峴3里)
- 널브이[널분이, 널빙이, 판번(板番), 넓으리]가 속해 있다. 억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1550년경 여주이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의성군 억곡면(億谷面) 소재지였던 마을이었다. 마을의 지형이 빈 널[棺]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거나, 골짜기가 넓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무성리(武成里)
- 무성1리(武成1里)
- 용산(龍山)[용성(龍城)]이 속해 있는데, 중무(中武)[내민(羅)] 북쪽 산 밑에 있는 마을로 위천(渭川) 동쪽 용산(龍山) 기슭이 된다. 1450년경 성씨(成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 남서쪽 위천의 깊은 소에서 용이 승천하였고, 용산도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용산(龍山)[용성(龍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 무성2리(武成2里)
- 하무(下武)[아래내민(下南面 ·下羅)]가 속해 있다. 중무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1300년경 엄씨(嚴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 서쪽에 뒷죽고개가 있어 여기에 안개가 끼면 호우가 시작되어 위천이 범람하므로 수해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 무성3리(武成3里)
- 중무(中武)[내민(羅)], 상무(上武)[웃내민(上羅), 상남면(上南面)] 등의 마을이 속해 있다. 중무(中武)[내민(羅)]마을은 위천 서쪽에 있는데 1700년경 김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1500년경 옥씨(玉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상무(上武)[웃내민(上羅), 상남면(上南面)]는 중무(中武) 위쪽에 있는 마을로 위천 서쪽에 있는데 1450년경 박씨(朴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군위읍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위천의 상류에 있어 상자(上字)가 붙었고, 면사무소 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상남면(上南面)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마을 뒤에 적라산(赤羅山)이 있고, 신라 경덕왕 때 이 마을이 무사의 주둔지였기 때문에 상무(上武)[웃내민(上羅)]라 하기도 하였다.
사직리(社稷里)
- 사직1리(社稷1里)
- 사직동(社稷洞[사직(社稷)골, 사단골(社壇谷), 사당곡(社堂谷)]이 속해 있으며, 사직단(社稷壇)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550년경 박한남(朴翰男) 장군의 선조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박한남(朴翰男) 장군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모신 공으로 사당을 지어 모셨으므로 사당[社堂谷]이라 불려졌다하기도 한다.
- 사직2리(社稷2里)
- 이전에는 지동(池洞)[못골]이라 불렀는데, 사직1리(社稷1里)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 밀직사 최성우(密直司 催成雨)가 개척하였으며, 소(沼)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동(池洞)[못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삽령리(鈒嶺里)
- 삽령리는 1개의 행정리에 삽재[삽령(鈒嶺)], 큰골[대곡(大谷)], 등너매[작(적)은골, 정골]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1670년(현종11) 홍성(洪晟)이 이 마을을 개척하고 신성리(新城里)라 불었다.
- 삽재[삽령(鈒嶺)]는 약 270여 년 전 남양홍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면서 신성(新城),신성(薪城)으로 바꾸어 부르다가 재[고개]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삽재[삽령(鈒嶺)]로 불리고 있다. 큰골[대곡(大谷)]은 삽재[삽령(鈒嶺)] 남쪽에 위치한 제일 큰 마을로 골이 깊고 커서 큰골[大谷]이라 불린다. 등너매[작(적)은골, 정골]는 삽재[삽령(鈒嶺)]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골이 얕고 작아 작은골이라 불렀고, 큰골에서 작은 구릉 너머가 되므로 등너매라 부른다.
상곡리(上谷里)
- 상곡리는 토일(吐日), 샘위뜸, 군위편(軍威便)[아래뜸], 안말, 양지뜸, 의성편(義城便), 극락(極樂)[극내기] 등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나, 마을의 확실한 역사는 알 수 없다. 토일(吐日) 위쪽이 되므로 웃토일, 상토곡, 상토동, 상토라 하였다. 토일(吐日)은 동래정씨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군위읍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방산(船放山)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의 모습이 토시를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마을의 북쪽에 지보사(持寶寺)가 있는데, 절의 경내에서 황청토를 캐내어 염색재료로 썼기 때문에 보물을 가진 절이라 하여 지보사(持寶寺)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샘위뜸은 토일(吐日) 내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서씨(徐氏) 일족이 집단 거주하고 있다. 아래뜸 군위편(軍威便)은토일(吐日) 내의 아랫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이 마을 최대의 저수지가 있다. 안말은 토일(吐日) 내의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양지뜸은 토일(吐日) 내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세대수가 가장 많으며, 양지쪽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의성편(義城便)은 토일(吐日) 내 동쪽에 위치하며, 의성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다. 산의 모양이 아담하고 이 산을 넘으면 의성(義城)이 된다. 극락(極樂)[극내기]는 토일(吐日) 북쪽, 군위읍(軍威邑)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10가구가 넘으면 재난이 닥친다 하며, 극락사(極樂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페이지 만족도조사
- 담당부서 : 문화관광과
- 전화번호 : 054-380-6062
- 최종수정일 : 2024-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