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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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보면
본 면은 고려시대 이전의 연혁이 문헌에 없어 조사하기 곤란하나 , 조선시대 화곡면, 소소보면, 석본면으로 군위현에 속하다가, 고종 32년 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 군위군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3월 부, 군, 면을 통폐합함에 따라 소소본면의 10개동(대흥, 농암, 상소, 하소, 범바, 부흥, 달천, 언실, 모로, 상우), 석본면의 7개동(서경, 괘겸, 평지, 산법, 하계, 상원, 안령), 화곡면의 12개동(화실, 사촌, 달산, 낭성, 백현, 보촌, 복성, 율리, 사지, 두개, 수철, 대량), 선산군 산동면의 3개동(신흥, 산개, 오류)를 병합하여 소보면이라 칭하고 있다.
리
- 사리리(沙里里)
- 보현리(寶峴里)
- 복성리(福星里)
- 위성리(渭城里)
- 달산리(達山里)
- 송원리(松院里)
- 신계리(新溪里)
- 도산리(桃山里)
- 서경리(西京里)
- 평호리(平湖里)
- 산법리(山法里)
- 내의리(來儀里)
- 봉황리(鳳凰里)
- 봉소리(鳳韶里)
사리리(沙里里)
- 들이 넓게 펼쳐진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낙동강의 지류가 흐르며 논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위천변이라 모래가 많은 마을이란 뜻으로 사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자연마을로는 율리, 중산, 새기터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있다.
- 사리1리
- 율리 : 율리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앞에 밤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산 : 중산마을은 사리리 중앙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사리2리
- 새기터 : 새기터마을은 옛날에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는 뜻에서 사지라고도 한다.
보현리(寶峴里)
-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보촌과 흰티의 2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보현1리
- 보촌 : 뒷산에 철광이 있다하여 보촌이라 하였으며 서쪽에 시팡이곡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쇠를 팠다고 한다.
- 보현2리
- 흰티 : 옛날 나무가 없을 때 산의 흙이 희게 보였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 그리고 보현2리에 속한 작은 마을로 옹기를 구웠다고 하여 점동네라는 자연부락이 있으며 그 자취로 지금도 사기 그릇조각이 남아 있다.
복성리(福星里)
- 들이 넓게 펼쳐진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복샘이 있으므로 복성리라 하였다. 집리, 굴티, 황산동, 중산, 독정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자연부락별 유래
- 집리 : 집들이 모여있다하여 집리라 하였으며 본 마을명의 유래와 동일하다.
- 황산동 : 복성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뒤의 산이 거칠다 하여 황산이라고 하며, 마을 뒷골에 황물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 굴티 : 복성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비탈에 비스듬히 자리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산 : 복성동 서쪽에 있는 마을로 복성동과 사리동 사이 산기슭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중산이라 한다.
- 독정 : 복성 남쪽 강 건너에 있는 마을로 마을 옆에 정자가 한 채 있다하여 독정이라 부른다.
위성리(渭城里)
- 위성리는 4개 행정리에 속한 화실,대량, 낭자, 사촌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 위성1리
- 화실 : 위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조선 초에 번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 뒷산 산세가 매화처럼 되었다하여 화실이라 하였다.
- 한골 : 옛 고을이 있었다고 하여 한읍이라 하다가 뒤에 한골이 되었다.
- 위성2리
- 대량 : 낭자 남쪽에 있는 큰 마을로 어진 사람이 많이 나도록 하기 위하여 대량이라 불렀다 하기도 하고, 혹은 장사가 많이 났다는 뜻에서 불려진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아이는 형제만 낳아야 하며, 3형제가 되면 한 집이 망하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 화창 : 조선 연산군 때 이표가 선전관으로 부임하여 사창을 개설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백성들의 살림을 돌보았다고 한다. 사창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사창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화창이라부르고 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위천이 있어 육로가 발달하지 못하였을 때 소금배가 이 길을 따라 마을 앞까지 들어 왔다고 하며, 화창의 곡식을 배로 실어 의성 비안으로 갔다고 한다. 본래는 여기가 소보면 소재지였다.
- 위성3리
- 낭성(낭자) : 320년 전 행주은씨가 개척하여 냉재라 하였는데 후에 낭자로 되었다 한다. 옛날 이 곳에 성이 있었고, 지금도 성터가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 하기도 한다. 또 큰 강이 마을 주위를 굽이쳐 흐르는 모양이 성을 쌓아 놓은 듯 하여 낭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기도 한다. 또 위천수와 모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낭성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 위성4리
- 사촌 : 류씨가 처음 개척하였으며, 약 450여 년 전 마을에 사기점이 있었다고 하여 사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달산리(達山里)
- 달산리는 2개의 행정리에 속한 두란 엄문, 법주, 수철, 흠걸 등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있다.
- 달산 1리
- 두란(달목) : 두란은 달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다. 달목은 이씨와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그 시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마을 이름인 달목은 뒷산에 망월소, 망산 등이 있는데, 정월 대보름이면 달을 보고 놀았다는데서 "달을 눈으로 보는 등성이" 곧 달목이라 불렀다고 하며, 그 아래에 마을이 있어 달산이라 불렀다 하기도 한다.
- 엄문 : 달산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영월엄씨가 많이 살았던데서 유래하였다.
- 양지(陽地) : 27가구에 135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이조인조때에 신을균이라는 사람이 이마을에 거주하여 산과 골이 아름답다하여 이마을을 가실이라하였음
- 金水골 : 27가구에 135명 인구가 살고있으며 이조인조때에 신을균이라는 사람이 이마을에 거주하여 산과 골이 아름답다하여 이마을을 가실이라하였음
- 달산2리
- 법주 : 엄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법주사 입구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개척시기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에서는 마을의 형상이 행주형이라 독천을 파는 것은 배의 밑을 뚫는 것과 같기 때문에 샘은 파지 않았다. 현재는 기와도 올리고 샘도 판다.
- 흠걸 : 법주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홈돌이 있는데 , 수철에서 나는 물을 배다리로 통하게 하여 농업용수에 이용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수철 : 홈걸 남쪽에 있는 마을로 1370년경 남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산전을 일구어 살고 있었는데 산골짜기에서 쇠 조각이 붙은 광석이 많이 발견되어 마을 이름을 쇠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뒷산에 쇠가 나는 곳이 있고, 마을의 맞은편 조산 기슭에 냉정수가 흐른다고 하여 수철이라 이른다. 일제 강점 말기에 금, 주석 등을 채굴하다 해방후 폐광되었으며, 흔적이 남아 있고 쇠가 난다고 한다. 일설에는 무쇠점이 있었다하여 쇠점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 두개실 : 엄문 남쪽에 있는 마을로 노씨들이 20여 가구가 살았으며, 남양홍씨의 재실이 있었으나, 현재는 재실만 남아 있고 모두 이주하였다.
송원리(松院里)
- 송원리는 2개의 행정리에 안령(질매제), 시장, 대송, 석정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있다.
- 송원1리
- 안령(질매제) : 송원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1514년 홍라호가 개척하여 주위의 산세가 마치 말이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하여 주마현곡이라 부르다가 마을 동편의 고개길이 말의 안장과 같다고 하여 안령이라 했다고 하며 또한 안령 뒷산이 말과 같은 형상에다 암산이므로 마암산이라 부르고 그 고개길이 소매와 같다고 해서 질매재라 불러 오고 있다.
- 송원2리
- 대송 : 질매재 서쪽에 있는 마을로 1500년 전 엄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당시 마을 앞에 큰 소나무가 많아 대송이라 하였다하나, 현재 소나무는 자취도 없다. 위성리 화창에 있던 소보면 사무소가 옮겨오면서 소재지로서 각종의 관공서가 위치하고 있다.
- 석정(돌정자) : 질매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북편의 큰 바위에 정자나무가 서 있어서 석정으로 불리워졌다.
- 시장 : 1958년 소보시장이 개척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시장이 열리는 마을이라 하여 시장이라 하였는데 2,7일에 장이 선다. 면 행정의 중심지로서 농협, 우체국, 정류소 등이 있다.
신계리(新溪里)
- 신계리는 1개 행정리에 화일, 신계(웃말), 상골, 상계동, 등의 자연 마을이 소속되어 있다. 마을을 개척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홍천최씨, 경주손씨, 동래정씨, 능성구씨가 개척하였다. 홍천 최씨가 최초로 개척하여 좋은 위치에 있다하여 화계라 했으며, 후에 손씨가 화계에 자리 잡았으며, 구씨가 위치하는 곳은 신흥이라 하였다. 화일은 옛날 방천에 복숭아꽃이 많아서 화일이라 불렸고, 양조장을 중심으로 화일장터가 있어서, 주막과 농기구, 농산물 등을 팔던 곳이었으나, 64년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신계(웃말)는 신계리의 본동으로 경주손씨, 능성구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상골은 화일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의 위쪽에 있다하여 상계라 하였다.
도산리(桃山里)
- 도산리는 2개의 행정리에 우무실, 원마, 새마, 칠봉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 도산1리
- 우무실 : 일선김씨 입향조가 임진왜란을 피하여 들어와 우무곡이라 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우무실이라 부른다.
- 원마 : 도산동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때 원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새마 : 해주오씨가 우무실에서 이주하여 터전을 잡으면서 새로 개척된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도산2리
- 칠붕 : 칠봉마을은 우무실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의 일곱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려 있다하여 칠봉이라 불렀다. 300여 년 전 구미시 장천면 명곡동서 이주한 강화노씨가 임진왜란 때 피난 와서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서경리(西京里)
- 서경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이다. 차돌이 있는 산 밑이 되므로 돌밑, 또는 석영으로 불리우다가 변하여 서경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돌밑, 사창, 굼말, 안마을, 석하, 서경, 석영 용수 등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다.
- 돌밑 : 돌밑(굼말, 안마을, 석하, 서경, 석영)은 본래 차돌이 있는 산 밑에 있다하여 돌밑, 또는 석영이라 불리다가 서경이 되었다. 삼국시대에 상주국과 서경국이 대치하고 있을 때 서경국의 수도였다는 속설이 있다.
- 용수 : 서경동쪽에 있는 마을로 그 유래와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옛날마을 앞에 용수지라는 못이 있었는데, 이 못에서 용이 등천하였다하여 용소라고 불려졌다. 일설에는 영천이씨가 조상의 광중을 파다가 풍수가 풍령에서 백마를 탄 사람이 오기 전에 매장하라고 했다. 광중을 파던 중 석함이 나와 서로 다투는 중 그 사람이 나타나 석함을 깨니 잉어가 광중에서 나와 사라졌다. 그 후 자손들이 잉어가 잘 살라는 뜻에서 못을 팠다. 이 못을 어못, 어미골, 또는 용소라고 불렀는데 마을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 한 것이라 한다.
평호리(平湖里)
- 평호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르며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자연마을로는 평지마, 개겸(낫거리), 우북동 등이 있다.
- 평지마 : 평호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경주김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앞 들이 넓다하여 평지마라 불렀으나, 일제 강점기에 평호동으로 고쳐 불렀다.
- 괘겸(낫거리) : 평지마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지세가 낫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주김씨가 개척하였으며 마을 앞산에 용천굴이란 동굴이 있는데 약 80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옛날의 피난처였다.
- 우복동 : 현 구미시 산동면과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로 산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마치 소가 앉아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 우복동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이 마을의 주민 생활이 인근 주민들보다 풍부하여 복이 많은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산법리(山法里)
- 산법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한 곳이다. 산골짜기가 되므로 산법리라 하였으며 산월,윗뜸, 거사골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산월(산법)이라는 명칭은 마을이 사방 산으로 둘러 싸였고, 산의 형세가 반월과 같이 생겼다하여 산월리라 불려졌다. 마을의 가까운 곳에 옛날의 절터가 남아 있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리고 풀밭 가운데 흔적만 남아 있다.
내의리(來儀里)
- 내의리는 3개 행정리에 대포, 감재, 상얌, 중얌, 하얌, 진재, 모로, 아래언실, 윗언실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근처에 있는 봉황산의 봉황이 와서 논다는 뜻인 鳳凰來儀를 차용하여 내의동이라 하였다.
- 내의1리
- 대포 : 임진왜란 때 장대봉에 대포를 놓고 쏘았다하여 대포라고 한다. 그 마을 앞을 대포들이라 하며, 이곳에 옛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 양암 (양바우, 얌대) : 내의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조선 숙종 때 최윤길이라는 학자가 이곳에 와 보니 마을 앞에 바위가 둘이 있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양암 위쪽에 있다는 뜻에서 웃얌대(상얌)이라 불려 졌다고 하며, 양암 하류 쪽에 있다하여 아랫얌대(하얌)이라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비안에서 피난 온 정씨가 개척했다고 한다.
- 내의2리
- 진재 : 길고 험한 골짜기 재(진재) 밑에 있으므로 불려진 이름이다.
- 모로동(모로골) : 행주은씨가 중국에서 건너온 후 그의 후손인 은상열이 1570년 개척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마을 뒤 골짜기 새빛이란 곳에서는 피란하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 내의3리
- 언실 : 언실은 봉황이 오는 거동이 옷이 펄렁이는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언실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언실이라 하며, 아래 쪽에 있는 마을을 아랫언실이라 한다.
봉황리(鳳凰里)
- 봉황리는 3개의 행정리에 연곡, 호암(범바위), 달천, 월천 등의 지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봉황1리
- 연곡(부엉이) : 마을 뒤에 연뱅이골이 있는데, 매우 긴 골짜기이며, 골짜기 안 연못에 연꽃이 피어서 연곡이라 한다. 부엉이라는 명칭은 전하는 말에 옛날 두모국의 왕이 적국 장사에게 쫓기다 환심고개에서 붙잡혔는데, 장사의 날래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짐승에 비유하여 부엉이라고 불렀다 한다.
- 봉황2리
- 호암(범바우) : 마을 뒤의 바위가 범이 앉은 것 같은 형상이어서 범바우라 한다.
- 봉황3리
- 달천 : 마을 주변으로 위천이 흐르고 있는데 위천의 모양이 마치 달과 같이 둥글게 흐르고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봉소리(鳳韶里)
- 봉소리는 옛날 서씨 일가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마을이 번창하다가 성지라는 못을 파고부터 쇠잔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상소, 하소, 두못들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두못들 : 하소 서쪽 내 건너에 있는 마을로 삼한시대 때 두모국이 이곳에서 개국하여 선정하던 자리라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도들머리산의 기슭에서 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 상소 : 봉소리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서씨 일가가 처음 들어와 번창하다가 성지라는 못을 판 후 쇠잔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마을의 형성에 대한 내용은 잘 알 수 없다.
- 하소 : 봉소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상소와는 등성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위력곡이라는 골이 깊어 천수답시절에도 수리가 좋았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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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24-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