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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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면
신라시대(467년)에 고로부곡(古老部曲)이라 불리었으며, 고려시대 (1062년)는 귀산현과 부림현을 병합하여 의흥군으로 되었다가 현종 9년에 안동군에 귀속되었으며, 조선시대(1408년)는 의흥군 소수면(義興郡 小首面)과 의성군 소야면(義城郡 巢野面)으로 분리되었고, 1914년 부군령에 의하여 행정구역 개편시에 다시 통합되어 그당시 고로실(현재괴산리) 이름을 따서 고로(古老)라 칭해져 오고 있다.
리
화수리(華水里)
- 집실(集室)·가곡(家谷)·하회(河回)라고 불리기도 한 이 곳은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경주 이씨(慶州 李氏)가 산이 준엄하고 땅이 기름져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가곡(家谷)이라 칭함. 그 후 280년 전 김영 김씨(金寧 金氏)가 자리 잡아 많은 사람이 모여 산다고 집실(集室)이라고 부름. 물이 마을을 안고 돌아 흐른다고하여(乙자 모양: 점이 마을) 하회(河回)라 함. 그 뒤 1914년 행정 개편으로 화수(華水)라 칭함.
- 여덕(汝德)이라는 곳은 장명호(張命虎)라는 선비가 약 400년 전에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계곡이 깊고 숲이 울창 하여 여덕(汝德)이라 칭하였다. 일설에는 약 300년 전에 장대 유(張大維)라는 선비가 사람이 숲의 덕을 본다고 하여 여덕 (汝德)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넌덕이라 함. 그리고 이 곳에 영천군 신녕면으로 넘어가는 갑티재라고 하 는 재가 있는데 장군의 갑옷 입은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불 려짐.
화북리(華北里)
- 인각(麟角)이라고 부르는 곳은 화북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인각사 앞에 있으므로 인각이라 함. 인각사(麟角寺)의 유래는 사찰 맞은 편에 학소대라는 가파른 절벽이 있는데 여기서 놀던 기린이 암벽에 떨어져 뿔이 빠져 서 인각사라 하였다 고려때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였으며 보각국사비가 있다.
- 둥디이·둥딩·둥둥이·부부(缶缶)라고 부르는 곳은 부락 뒷산이 흡사 장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소리가 둥둥나는 것 같다고 해서 둥디이라고 불렀다.
- 쌀매기·쌀미기·용암(龍岩)이라고 부르는 곳은 쌀이 많이 났다 하여 쌀매기라 불렀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마을 입구에 있으며 골짜기에는 용추폭 포(龍湫瀑布)가 있는데 비류직하 수십척이라 옛날에 의흥군수 가 큰 가뭄때 기우제를 올리던 곳으로 신령한 곳이라 한다.
- 화산A지구·재건동(再建洞)이라고 부르는 곳은 1962년 정착민 들로 구성된 A,B,C,D마을이 산재되었는데 군부대가 주둔하여 민간 주민들은 A지구 마을만 그대로 두고 다른 부락은 다 철거 시켰다. 철거민은 주변지역인 감자골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감자골은 영천군 신녕면 화남리이며, 권오룡(權五龍)이 세계 제 2차 대전 때 징용 및 보국대로 주민들이 끌려가자 남은 사람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화산(華山)벌을 개간하여 감자를 많이 심어 감자골이라고도 한다.
- 덕치·덕천(德泉)이라고 부르는 곳은 인각 남쪽에 있는 마을로 바위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자연샘이 있는데 물이 차고 맑다. 옛날에는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어떤 병이라도 치료 할 수 있어 덕을 보았다고 한다. 근래에 유림에서 화산성(華山城)을 축조한 괴간 윤숙(槐杆 尹 淑)을 추모하는 경막단(景幕壇)을 설치 하였다.
괴산리(槐山里)
- 고로실·괴리곡·골실·고로곡(古老谷)·환동(環洞)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신라시대 이지방을 고로부곡이라 칭하였다.
- 골마당·동정(洞庭), 동지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이곳에 가장 먼저 피란온 사람은 金씨라 전해지고 있다.
- 돌골·석전(石田)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이곳은 부락 및 논밭 일대에 큰 바위와 돌이 많아 돌밭이라 하다가 石田이라 불리워졌다.
- 새산·신산(新山)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돌골보다 좀 늦게 생겼 으며 산 아래에 새로 생긴 부락이라 하여 새산이라 불림.
학성리(鶴城里)
- 태자뱅이·태암(台岩)이라고 부르는 면소재지는 부락 옆에 태자암(太子岩)이란 바위가 있는데 태자(太子)가 서있는 모양 같다고 하여 자(子)를 뺀 태암이라 부름.
- 청학(靑鶴)이라고 부르는 곳은 인각사(麟角寺) 맞은 편에 가파 른 절벽이 학소대(鶴巢臺)이고 청학리(靑鶴里) 뒷산에 있는 큰 바위가 태자암(太自岩)이다.
- 용아(龍牙)라 부르는 곳은 마을 입구의 산형이 좌우가 용아 같 다 하여 이름을 용아라 부르며, 임진왜란 이전부터 사람이 살 고 있었으며, 안용아·내용아·파성(巴城)이라고 부르는 곳은 용 아(龍牙)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안용아라고 부름.
장곡리(長谷里)
- 개머리·당마·당리(堂里)·구두(狗頭)라고도 하며, 마을 앞산이 개가 엎드려 고개를 들고 있는 형상이므로 개머리 라고 하고 동재를 지내는 당나무가 있어 당리(堂里)라고도 한다.
- 바랑골·바랑개머리·정곡(正谷)이라는 곳은 개머리에서 곧게 동북 방향으로 길게 바로 뻗은 골짜기라 하여 정곡(正谷)이라 칭하였으며, 와전되어 바랑골이라 한다.
- 한티·안개머리·경림동(瓊林洞)이라고 부르는 곳은 영천으로 가는 길에 한티재 대현(大峴)이 있으므로 한티라 하고, 구두 (狗頭)의 안쪽에 있기에 안개머리라 부르기도 하고, 경림산(瓊 林山) 아래에 위치하므로 경림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곡리(仁谷里)
- 지경(地境·내포(內浦)라고도 하며, 이조때 의흥군 소수면(義興 郡 小首面)과 의성군 소야면(義城郡 巢野面)의 경계가 내를 기준하여 양지마을은 소야면(巢野面), 음지마을은 소수면(小首 面)에 속하므로 지경이라 칭하였으며, 일명 내포(內浦)라고도 하는데 마을 한가운데 내가 흐르므로 불리어진 지명이다.
- 대인골·대인(大人)이라고 불리는 곳은 마을 입구의 산중턱에 높이 솟은 이름이 장군석(將軍石) 또는 대인석(大人石)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대인(大人)이 대인(大仁)이라고도 한다.
- 병팜·병풍암(屛風庵)이라고 불리는 곳은 부락 주위에 바위가 병풍같이 둘러 싸여 있으며, 1300여 년 전 신라시대 암자가 마을 안에 있었으므로 불려진 지명이다.
- 분재골·분령곡(分嶺谷)이라고 불리는 곳은 영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방하산(方可山)이 솟아 있으며, 방하산(方可山)을 넘어 서 영천(永川)으로 통하는데 그 고개를 分峴이라고 하여 분재 골이 되었다.
양지리(陽地里)
- 머내·머귀내·머기내·머내기·오천(梧川)라고 부르기도 하는 마을로 앞냇가에 오동(梧桐)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머내 부락의 한가운데를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를 경계로 서쪽 마을은 해가 일찍 돋고 따뜻하다고 하여 양지마라고 하며, 개천의 동쪽 마을은 해가 늦게 돋고 춥기 때문에 음지 마라고 불린다.
낙전리(樂田里)
- 3골짜기(갈산골, 싸리발골, 연밭골)가 있는데 갈산골·갈선(葛 仙)·갈산곡(葛山谷)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는 부근 산에 칡이 많이 얽혀져 있고, 신선한 곳이므로 갈선이라 하였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갈산골·갈상으로 불려지고도 있다.
- 싸리밭골·쌀밭골·축전(杻田)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는 인접한 산에 싸리가 많았으며, 그 동네가 생길 때 싸리를 베어 낸 터에 집과 농토를 개간하였다고 한다.
- 연밭골·연전(蓮田)·연방(蓮房)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는 부락 주위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이 곳에서는 옛날에 연을 많이 심었기 때문에 연밭골이라 불리워지기도 하고, 또 이곳 산세가 마치 연꽃이 물위에 더 있는 것 같은 지형이라서 연밭골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가암리(加岩里)
- 노리맛·노리목·장항(獐項)·하리(下里)라고 부르는 이 곳은 가암리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옆에 노리(노루) 형의 산이 있는데 이로 인하여 노리목 혹은 노리맛으로 불려진다.
- 안노리맛·중리(中里)라고 부르는 이 곳은 노리맛이란 부락은 두 개의 마을이 합해져서 형성되었는데, 안쪽에 위치한 부락을 일컬어 안노리맛이라 한다.
- 흰더미·흰덤·백암(白岩)라고 부르는 이 곳은 안노리맛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 뒷산에 흰덤이 있어 백암·흰덤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 부채미기·부채매기· 불항(佛項)라고 부르는 이 곳은 노리맛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 지형이 부처의 목과 같이 생겼으며 돌부처가 있었다 한다.
석산리(石山里)
- 석정(石井)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부락 서쪽 입구에 돌샘이 있는데 돌 사이에서 물이 자연적으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어 붙어진 이름이며,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 유사골·유사(有司·有寺)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들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 부락뒤에 불사당(佛寺堂)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유사골이라 한다.
학암리(鶴岩里)
- 서낭골·성황골·성황동(城隍洞)이라고 하는 이 곳은 신라 선덕 여왕때 의상조사가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의 이름이 성황사(城 皇寺)라 불렀는데 현재 절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데 아직도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절이 있을 때는 민가가 없었다고 하며 그때의 성황사에 의해서 동내이름이 서낭골이 된 것같다.
- 동부(東部)·방학동(放鶴洞)이라고 하는 이 곳은 바우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이곳은 동쪽의 경계점이었으며 지금도 영천군과의 경계지점이다. 부락 뒷편 고개위에서 학을 놓아주 었다는 설에 따라 방학동(放鶴洞)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선기동·신기(新基)·신기동(新基洞)이라는 곳은 마을 부근의 산이 묘하게 생겨 신선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 큰학골·대학동(大鶴洞)이라는 곳은 산의 모양이 학과 비슷한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큰 봉우리 아래 형성된 골짜기를 말하는데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 기에는 부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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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24-02-21